『미노스·사랑하는 사람들』
플라톤 저/ 강철웅 역, 아카넷, 2021년 8월 27일
책소개
“『미노스』는 보편과 개별의 긴장, 소통-공감의 문제와 더불어 칭찬의 균형을 이야기한다. 칭찬의 적절한 ‘배분’이 ‘법’이고, 칭찬의 달인이 ‘시인’이며, 칭찬을 잘하는 게 좋은 ‘시가’다.”
『미노스』가 끝나는 곳에서 『법률』이, 그리고 『법률』이 끝나는 곳에서 『에피노미스』가 시작된다고 흔히들 생각해 왔다. 플라톤 저작 분류의 대표 격인 트라쉴로스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의 눈에 이런 ‘삼부작’ 구도는 『미노스』를 묶는 전통적인 끈이었다. 이런 묶음이 『미노스』를 『법률』의 앞뒤에 놓인 두 위작 가운데 하나로 치부하는 근거 노릇을 해 온 것 또한 『미노스』가 겪을 수밖에 없는 일종의 운명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플라톤의 작품 하나하나는 실로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미노스』에서 동료가 소크라테스의 논의에 계속 저항과 이견을 표명하면서 붙들고자 한 생각들이 가진 의미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이런 것 아닐까? 보편의 이름으로, 본질의 이름으로 통일된 ‘하나’ 말고 구체적이고 서로 다른 제각각의 면모와 특징을 지닌 하나하나에 주목하고 그것들 하나하나를 들여다보자는 것 말이다. 보편의 베일에 가려진 그 개별의 중요성, 디테일의 중요성은 『법률』에서 아테네인 손님에 의해 되살아난다. 『미노스』는 『법률』의 서론으로 덧붙여지는 작품이 아니라 『법률』과 다른 목소리, 그러나 결국 『법률』에 의해 수용되는, 소통과 공감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목소리가 담긴 작품이다. 그것이 재현하는 하나-여럿, 토큰-유형, 보편-개별, 이론-실천 간의 대립과 긴장은 한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압도하고 삼켜 버리는, 정답이 정해진 싸움이 아니라, 양자가 긴장 속에 공존하면서 조화와 공감을 모색하고 이루어 가는 복합적 경쟁으로서, 오늘날 우리 담론 세상이 도달해야 할 과제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철학론과 에로스, 두 축으로 전개된다. 단순한 철학론/인문학론 내지 권학론에 머무는 게 아니라 세대를 교차하는 교육의 이야기, 문화적 소통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의 두 축인 철학론(내지 인문학론)의 문제와 철학 교육(내지 인문 교양 교육)의 문제가 상당히 긴밀한 연관을 가진 채로 숙고를 요구하기에 오늘 우리에게도 이 작품은 여전히 흥미로울 수 있다. 디오뉘시오스 학교 학생들의 논쟁 장면이 젊은 연적들과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로 이행하는 장면은 소크라테스적 대화로 대변되는 철학으로의 권학 성격을 띤 논의일 수 있을 터인데, 정작 그 대화에서 다루어지는 건 철학에 대한 상반되는 반응과 태도들이며, 흥미롭게도 철학에 우호적인 애지인의 입장이 소크라테스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된다. 체육 사랑과의 유비를 통해 지혜 사랑에서도 많은 배움이 아니라 적당한 배움이 영혼을 이롭게 한다는 논의가 헤라클레이토스를 연상케 하며 인상적으로 펼쳐지기도 한다.
역자소개:
강철웅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플라톤 인식론 연구로 석사 학위를, 파르메니데스 단편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하버드대 철학과에서 박사 논문 연구를, 케임브리지대 고전학부에서 기원전 1세기 아카데미 철학을 주제로 박사후 연수를 수행했다. 고대 희랍-라틴 고전의 번역과 연구에 매진하는 정암학당의 창립 멤버이자 케임브리지대 클레어홀 종신 멤버이며, 미 국무부 초청 풀브라이트 학자로 보스턴 칼리지 철학과에서 활동했다. 현재 강릉원주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 『설득과 비판: 초기 희랍의 철학 담론 전통』(2017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제29회 열암철학상), 『서양고대철학 1』(공저)이 있고, 역서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공역),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 『뤼시스』, 『향연』, 『법률』(공역), 『편지들』(공역), 존 던의
『민주주의의 수수께끼』(공역, 2016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소피스트 단편 선집』 등이 있다. 고대 희랍이 가꾼 문화 자산인 ‘진지한 유희’를 단초로 삼아 우리 담론 문화가 이분법과 배타성을 넘어 열린 자세와 균형을 찾는 데 일조하려 하며, 특히 역사 속에서 희미해진 ‘마이너’들의 목소리를 듣고 되살리려 애쓰고 있다. (이메일: cukang@gwnu.ac.kr)
목차
‘정암고전총서’를 펴내며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을 새롭게 펴내며
미노스
작품 내용 구분
등장인물
일러두기
본문
주석
작품 안내
참고문헌
찾아보기
한국어-희랍어
희랍어-한국어
고유명사
사랑하는 사람들
작품 내용 구분
등장인물
일러두기
본문
주석
작품 안내
참고문헌
찾아보기
한국어-희랍어
희랍어-한국어
고유명사
옮긴이의 말
출판사 리뷰
‘위작’으로 치부되던 ‘특이한 두 작품’
이제 우린 플라톤 작품집의 새로운 면모를 만난다
『미노스』
“『미노스』는 보편과 개별의 긴장, 소통-공감의 문제와 더불어 칭찬의 균형을 이야기한다. 칭찬의 적절한 ‘배분’이 ‘법’이고, 칭찬의 달인이 ‘시인’이며, 칭찬을 잘하는 게 좋은 ‘시가’다.”
『미노스』가 끝나는 곳에서 『법률』이, 그리고 『법률』이 끝나는 곳에서 『에피노미스』가 시작된다고 흔히들 생각해 왔다. 플라톤 저작 분류의 대표 격인 트라쉴로스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의 눈에 이런 ‘삼부작’ 구도는 『미노스』를 묶는 전통적인 끈이었다. 이런 묶음이 『미노스』를 『법률』의 앞뒤에 놓인 두 위작 가운데 하나로 치부하는 근거 노릇을 해 온 것 또한 『미노스』가 겪을 수밖에 없는 일종의 운명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플라톤의 작품 하나하나는 실로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미노스』에서 동료가 소크라테스의 논의에 계속 저항과 이견을 표명하면서 붙들고자 한 생각들이 가진 의미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이런 것 아닐까?
보편의 이름으로, 본질의 이름으로 통일된 ‘하나’ 말고 구체적이고 서로 다른 제각각의 면모와 특징을 지닌 하나하나에 주목하고 그것들 하나하나를 들여다보자는 것 말이다. 보편의 베일에 가려진 그 개별의 중요성, 디테일의 중요성은 『법률』에서 아테네인 손님에 의해 되살아난다. 『미노스』는 『법률』의 서론으로 덧붙여지는 작품이 아니라 『법률』과 다른 목소리, 그러나 결국 『법률』에 의해 수용되는, 소통과 공감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목소리가 담긴 작품이다. 그것이 재현하는 하나-여럿, 토큰-유형, 보편-개별, 이론-실천 간의 대립과 긴장은 한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압도하고 삼켜 버리는, 정답이 정해진 싸움이 아니라, 양자가 긴장 속에 공존하면서 조화와 공감을 모색하고 이루어 가는 복합적 경쟁으로서, 오늘날 우리 담론 세상이 도달해야 할 과제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제까지 우리가 주목해 온 ‘법이란 무엇인가?’라는 첫 질문이나 ‘미노스’라는 제목만이 아니라 후반부에서 계속 강조되고 있는 미노스 찬양까지도 감안하여, 누군가는 자연스럽게 『미노스』의 주제가, 혹은 『미노스』에서 저자가 힘주어 드러내려는 바가 미노스로 대변되는 훌륭한 입법자나 훌륭한 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법률』 삼부작 착상도 실은 다분히 그것을 향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에 못지않게 중요한 이 작품의 핵심 주제는 이미 언급한 보편과 개별의 긴장이나 소통과 공감의 문제와 더불어 ‘칭찬’, 특히 ‘칭찬(및 비난)의 균형’이라고 할 수 있다.
후반부의 미노스 논의를 약간 다른 시각에서, 즉 무엇이 주제이고 누가 주인공인가에 주목하는 시각에서 벗어나서 접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칭찬의 적절한 ‘배분’이 ‘법’이고, 칭찬의 달인이 ‘시인’이며, 칭찬을 잘하는 게 좋은 ‘시가’다. 종결부 논의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칭찬-비난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하면서 메타적으로 칭찬-비난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칭찬-비난의 모델을 수행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가 평판 권력으로 작용하는 비극에 대해 칭찬과 비난을 동시에 하는 것 자체가, 그러면서 비극이 아니라 서사시를, 자기 논의를 펼치기 위한 분석과 입증의 주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 자체가 칭찬-비난 담론에 대한 균형감 있는 조명이 필요함을 보여 주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마지막의 부끄러움 이야기까지도 실은 일종의 ‘자기 비난’의 일환으로 볼 수 있으며, 결국 소크라테스에게서 칭찬과 비난은 시종일관 영혼의 좋음-나쁨 및 그것을 위한 교육과의 긴밀한 연관성 속에서 논의되고 수행된다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철학론과 에로스, 두 축으로 전개된다. 단순한 철학론/인문학론 내지 권학론에 머무는 게 아니라 세대를 교차하는 교육의 이야기, 문화적 소통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의 두 축인 철학론(내지 인문학론)의 문제와 철학 교육(내지 인문 교양 교육)의 문제가 상당히 긴밀한 연관을 가진 채로 숙고를 요구하기에 오늘 우리에게도 이 작품은 여전히 흥미로울 수 있다. 디오뉘시오스 학교 학생들의 논쟁 장면이 젊은 연적들과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로 이행하는 장면은 소크라테스적 대화로 대변되는 철학으로의 권학 성격을 띤 논의일 수 있을 터인데, 정작 그 대화에서 다루어지는 건 철학에 대한 상반되는 반응과 태도들이며, 흥미롭게도 철학에 우호적인 애지인의 입장이 소크라테스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된다. 체육 사랑과의 유비를 통해 지혜 사랑에서도 많은 배움이 아니라 적당한 배움이 영혼을 이롭게 한다는 논의가 헤라클레이토스를 연상케 하며 인상적으로 펼쳐지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철학 고유의 영역이 있는가의 문제는 최초 철학자들에게서는 거의 모든 학문을 포괄하던 철학이 점차 분과 학문들의 지속적인 분가와 더불어 살림살이가 줄어들면서, 철학이 무엇인가의 문제와 더불어 늘 물어진 문제였다. 애지인이 최초 단계의 철학이 지녔던 포괄성을 계속 추구한다면, 소크라테스는 통할성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우리가 무턱대고 후자의 이야기만 좇아가도 되는지는 좀 더 따져 보아야 할 문제다.
만능 내지 다재다능이 과연 우리 인문 교양이, 혹은 인문 교양 교육이 추구해야 할 궁극 목표인지는 의심스러운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의 통할적 앎이나 기술이 과연 우리 교육이 주목하고 성취해야 할 목표 인지 역시 마찬가지로 의심스럽다. 심지어 우리가 이른바 ‘수월성(excellence) 교육’에 초점을 맞춰 논의한다고 해도 그렇다. 이 작품의 소크라테스가 대변하는 교육은 흔히들 이야기하는 ‘전인 교육’의 목표와는 아무래도 좀 거리가 있어 보인다. 소크라테스적 교육의 본래 의도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영혼(즉, 정신) 혹은 지성 중심의 접근을 강조하는 것만큼은 분명하며, 그것이 자칫 교육에서 고려해야 할 다른 요소들, 즉 육체적, 정서적, 사회적 소양들에 대한 균형 잡힌 배려에 부정적인 영향으로 작용할 소지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진지함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적 활동에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던 소년들을 돌려세울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 소년들의 이런 관심 전환은 어쩌면 자연학적 관심에서 인간학적 혹은 정치철학적 관심으로 일대 전환을 이룬 소크라테스 자신의 탐구 여정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소년들을 계속 붙잡아 둘 만큼 소크라테스적 철학과 대화가 즐거울 수 있을까? 권학은 아마도 그것을 추동한 진지함만이 아니라 철학에 계속 머물게 할 만큼의 즐거움과 함께 가는 것이어야 궁극적 성공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얼마만큼이나 ‘재미진’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화 말미에서 소크라테스적 철학은 소년들의 ‘칭찬’을 받은 것으로 보고된다. 오늘 우리의 철학은 과연 그렇게 칭찬을 받을 정도로 진지하고 또 그 정도로 즐거운지 되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