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강 쿨만 교수님(Prof. Dr. Wolfgang Kullmann)을 추모하며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볼프강 쿨만 교수님(1927-2022)이 지난 2022년 4월 4일, 향년 9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소박하게 장례를 치르라’는 유언에 따라 장례식은 5월 2일 프라이부르크의 공원묘지에서 거행되었다. 쿨만 교수님은 마르부르크 대학교(1964년-1974년)와 프라이부르크 대학교(1975년-1996년)에서 고전학 교수로 재직했고, 은퇴 뒤에도 논문 지도와 왕성한 연구 활동을 이어갔다. 쿨만 교수님은 지난 70년 동안 고대 그리스 문학과 철학, 특히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한 연구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우리 시대 최고의 고전학자였다.
볼프강 쿨만 교수님은 <일리아스>에 대한 연구로써 고전학자의 삶을 시작했다. 교수님은 1952년, 당대 최고의 호메로스 연구자 볼프강 샤데발트(Wolfgang Schadewaldt) 교수의 지도아래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은 <일리아스에서 신들의 작용>(Das Wirken der Götter in der Ilias, 1956)이었다. 1957년에는 <일리아스의 원천들>(Die Quellen der Ilias, 1960)이라는 제목으로 교수자격논문(Habilitation)을 제출했다. 제목이 시사하듯이, 이 논문은 <일리아스>의 구술적 원천들을 추적하면서 이것들이 <일리아스> 안에서 어떻게 수용·변형되었는지를 분석한 연구였다. 이후 쿨만 교수님의 호메로스 연구는 그리스 서사시 일반과 구술전통과 문자문학의 관계 등에 대한 연구로 확장되었다. 특히 ‘호메로스 문제’에 대한 연구에서 쿨만 교수님은 독보적 업적을 성취했다. 지난 250년 이상 고전학계의 가장 뜨거운 논란거리가 되었던 ‘호메로스 문제’에 접근하는 주요 갈래 중 하나인 ‘신분석론’(Neoanalyse)을 발전시키고 동기 연구의 방법론을 체계화한 것은 쿨만 교수님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남았다.
볼프강 쿨만 교수님은 1970년대 이래 독일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수준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를 주도한 학자이기도 하다. 마르부르크 시절 출판된 <학문과 방법>(Wissenschaft und Methode, 1974)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방법론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연 역작이다. ‘현상론’(Phänomenologie), ‘원인론’(Aitiologie), ‘논증’(Apodeixis)을 키워드로 삼아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방법론을 탐구한 이 저서는 <분석론 후서>에 제시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이 그의 실제 생물학적 연구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밝힌 선구적 업적이었다. 이 방향의 연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체 생물학의 구성은 물론 그 안에 담긴 개별적 주제들에 대한 후속 연구와,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의 수용 과정에 대한 면밀한 추적 작업으로 이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현대 학문>(Aristoteles und die moderne Wissenschaft, 1998)과 <자연과학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als Naturwissenschaftler, 2014)에서 우리는 쿨만 교수님의 주요 이론들을 확인할 수 있다. 쿨만 교수님이 80세였던 2007년에 나온 <동물부분론>에 대한 번역과 주해(Aristoteles. Über die Teile der Lebewesen) 역시 교수님이 남긴 최고의 학문적 성과물 가운데 하나이다. 무려 820쪽에 이르는 이 번역·주해서에는 평생을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에 바친 노대가의 치밀한 관찰과 텍스트 분석, 방대한 지식을 동원한 해석, 현대 생물학의 성과들까지 반영한 성실한 비교 설명이 담겨 있다.
볼프강 쿨만 교수님이 95년의 생애 동안 남긴 연구 성과는 한눈에 가늠하기 어려운 정도이다. 교수님은 위에서 소개한 저서들을 비롯해서 여러 권의 저서와 150편이 넘는 논문을 남겼다. 저술의 주제는 그리스 서사시, 구술전통에서 문자문학으로의 이행, 그리스 비극, 고전기 그리스 철학, 헬레니즘 철학 등 그리스 문학과 철학의 전 분야를 망라한다. 놀라운 점은 이런 왕성한 연구와 저술 활동 중에도 41편에 이르는 박사학위 논문을 지도했다는 사실이다. 다양한 주제에 대한 광범위한 관심과 세심함과 인내심 있는 지도 능력, 학생들과의 격의 없는 학문적 소통이 없었다면 그렇게 많은 수의 제자를 키워내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제자들은 독일의 여러 김나지움의 교사로서, 독일 대학들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 대학의 교수로서 활동하고 있다. 볼프강 쿨만 교수님은 많은 제자들의 가슴 속에 연구자와 교육자로서 모범을 보인 ‘Doktorvater’로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볼프강 쿨만 교수님은 수많은 해외 강연을 했다. 특히 현지에서 해당 언어로 강연하는 정성을 보였다. 그의 저술들은 독일어 이외에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스페인어 등 외국어로 출간되어 국제적인 찬사와 반향을 얻었다. 이런 광범위한 연구, 저술, 교육, 강연 활동과 별도로 쿨만 교수님은 Karl und Gertrud Abel-Stiftung의 이사장으로 계시면서 정기적으로 국제 학술 대회를 개최하거나 지원했다. 그 결과물들은 이제껏 ‘Philosophie der Antike’ 시리즈의 단행본들로 40권 넘게 출간되었다.
볼프강 교수님은 녹내장과 쇠약한 몸 때문에 독서와 거동이 불편한 가운데도 2021년 <자연을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 가지 관점>(Drei Sichtweisen des Aristoteles auf die Natur)이라는 논문을 출간하셨다. 94세에 나온 논문이다. 이 논문은 우리에게 그동안 그리스 문학과 철학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해 준 쿨만 교수님의 마지막 글로 남았다. 우리는 교수님 덕분에 호메로스의 서사시들이 어떤 구술 서사의 동기들(Motive)로부터 형성되었는지를 알게 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방법론이 어떻게 실제 생물학적 연구에서 작동하는지를 배웠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동물지>에서 기술한 흑해 연안의 하루살이가 어떤 종(種)의 하루살이인지까지 확인하게 되었다. 쿨만 교수님은 그동안 연구자들이 간과한 사소한 것들까지 마치 현미경 아래에 놓고 관찰하듯이 보려고 했다. 그런 점에서 볼프강 교수님의 삶은 사소하고 미천한 것들까지 학문의 대상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신조를 구현한 삶이었다.
거인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우리는 그의 어깨 위에서 더 멀리, 더 넓게 고대 그리스의 정신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볼프강 쿨만 교수님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
Διὸ δεῖ μὴ δυσχεραίνειν παιδικῶς τὴν περὶ τῶν ἀτιμοτέρων ζῴων ἐπίσκεψιν. Ἐν πᾶσι γὰρ τοῖς φυσικοῖς ἔνεστί τι θαυμαστόν.
Deshalb darf man nicht in kindischer Weise einen Widerwillen gegen die Untersuchung der niedriger stehenden Lebewesen haben. Denn in allem Natürlichen ist etwas Wunderbares enthalten. (Wolfgang Kullmann, De partibus animalium, 645a15-17)
2022년 5월 3일
연세대학교 철학과 조대호
* 참고: https://www.altphil.uni-freiburg.de/dozenten/dozentenseiten/kullmann.html